Aerycrow @aerycrow.bsky.social · 08/10/2025그녀의 가족은 디트로이트와 캐나다 사이의 국경근처에 자리잡고 도망나온 노예들을 도왔습니다. 1853년 그녀는 The Provincial Freeman이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이자 편집인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에도 반노예제를 주장하는 신문은 있었지만 모두 백인의 입장에서 씌워진 것이었고 흑인의 시각에서 흑인노예제를 비판하는 신문은 이 신문이 최초였습니다. 113
Aerycrow @aerycrow.bsky.social · 08/10/2025다만 캐나다로 이주한만큼 흑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캐나다로 이주해야한다는 주장은 반노예제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논란꺼리였고 1855년 필라델피아 유색인종 컨벤션에 참가하려 했을 때에는 그녀의 대표권을 인정해야하는가하는 문제부터 논의해야했습니다. 다행히 투표를 거쳐 인정되었죠. 113
Aerycrow @aerycrow.bsky.social · 08/10/20251860년 남편이 사망하고 아이들과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남북전쟁당시 모병활동을 했습니다. 전쟁후에는 흑인,백인이 모두 다니는 공립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워싱턴DC로 이사한 이후 하워드법대를 졸업했고 1883년 60세의 나이에 미국 흑인여성으로서는 2번째 변호사가 됩니다. 그녀는 미국여성서프라지연합회에 가입한후 여성참정권을 위해 투쟁했고 미국연방하원의원 법사위원회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113